과학기술선현 발자취

탐방 | 한마당

'소식' 웹진  |  탐방연구회  |  과학관연구회  |  자유게시판

세종대왕(世宗大王)
우리나라 15세기 과학사의 중심에 계셨던 임금님

세종대왕 어떤 분이신가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1397년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2살의 나이로 충녕군에 책봉되고 22세의 나이로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32년간에 걸쳐 훈민정음의 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 등 큰 업적을 남기고 1450년에 54세로 승하 하였다.

세종은 어린 시절 공부에 열심이었다. '무서운 공부꾼'으로 영명(英明)하고 총명(聰明)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철학과 역사학에 흥미를 지니고 있었던 반면, 서도나 시에는 취미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거문고를 탈 수 있었지만 이를 즐기지는 않았고 문헌을 통해 이해한 음악 이론과 음향감은 상당히 날카로워 훗날 박연이 편경을 제작할 때 미소한 음의 차이를 포착할 정도였다. 세종은 자기가 기억력이 뛰어남을 말하기도 하였는데, 실록에는 '나는 책을 한 번 읽으면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궁중에서는 중국을 본따 새, 꽃, 나무를 키웠는데 세종은 과일나무로 대체하여 나라에 유용하게 쓰자고 명하였으며 후원에 조를 심게 하기도 하였다. 세종의 취미는 매사냥과 수렵이었으나 무술에 뛰어나지는 않았다. 결코 서생형, 또는 예술가형의 인물은 아니었고 주로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즐겨할 만큼 이론에 능하였다. 어릴 때는 양녕대군의 태도에 정면에서 비판을 가하고 반성을 촉구한 예는 태종실록에 가끔 나타난다. 세종의 이론이나 언변은 즉위 뒤에도 군신과의 의정이나 경연에서 항상 권위를 가지고 이끌었다.

세종은 유교인(儒敎人)으로 주자학적 교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중국의 학문과 사상을 즐겨 읽음으로써 그 당시의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이었다.

15세기 초반의 조선은 친원적인 고려에서 친명으로 틀을 바꾸어야 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태종 때와 마찬가지로 세종은 중국에 대하여 사대주의를 취한 것은 시대적인 상황으로 판단할 때 이해되는 것이었다. 명의 사신은 토산물의 요구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수렵용 매와 사냥개가 문제가 되었다. 명 사신은 일년에도 수차례식 입국하면 여러 달씩 체류하여 심한 때에는 2백마리 소바리의 짐을 꾸려 귀국한 예도 있다. 세종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대주의를 주장하여 대명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세종의 대명 정책은 굴욕적인 사대주의라기 보다 실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세종은 경학만으로는 실용성이 적고 세계관이나 자기반성을 위하여 사학의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세종의 학문관은 신하들의 사학 지식이 부족함을 수시로 지적하였다. 여기서 세종이 뜻하는 사학연구는 오늘날의 역사학이 아니라 중국의 고사성어에 나타난 것으로 왕으로서의 치세나 신하로서 누구나 가져야 할 수신제가의 반성을 위한 실용적인 것을 뜻한 것이었다.

이러한 학문적인 태도가 곧 세종의 실리, 실용주의와 결합되었으며, 이것이 세종 즉위 30여 년 동안 과학기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숭녕의 "세종대왕의 개성의 고찰" 참조)

연대별로 본 세종대왕의 활동

-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15일)에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남
- 1408년(12살) 때 충녕군에 책봉되고 심온의 따님과 혼인
- 1418년(세종 1년, 22세)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즉위
- 1420년 집현전을 확장. 청동활자(경자자)를 만들기 시작. 다음 해 주자소 설치해서 경자자를 만들어 인쇄기술을 개량. 서적을 적극 사들이도록 한 정책추진.
- 1422년 도성의 수축 사업. 새로 개조한 저울을 반포. 도량형 정비 사업의 시작.
- 1423년 조선통보를 부어만들게 함. 다음 해 4월에는 주전소를 경상도와 전라도에 설치, 새로운 화폐사용 정책을 추진.
- 1425년 새 동전 사용. 음악 서적을 편찬하는 일을 시작.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게 함. 박연의 공헌은 세종의 각별한 관심으로 빛을 더함.
- 1427년 [향약구급방]을 편찬 간행.
- 1429년 정초에게 [농사직설]을 편찬케하고 다음 해 인쇄반포.
- 1430년(세종 12년, 33세) 집현전 학자들에게 주척을 바로잡게 함. 조선왕조 도량형 정비 사업.
- 1431년 유효통과 노중례 등에게 [향약채취월령]을 편찬케 함.
- 1432년 맹사성등의 [(신찬)팔도지리지] 편찬 완료.
- 1433년 정초 등 혼천의를 완성하고, 유효통 등은 [향약집성방]을 편찬해 올렸으며, 장영실이 자격궁루를 만들어냄.
- 1434년 장영실이 만든 새 자격루를 공식 사용. 이천 등이 청동 활자 주조기술, 조판 기술을 혁시적으로 개량하고, 새 활자인 갑인자를 만들었음. 앙부일구를 제작하여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
- 1435년 화약을 제조하고 화약고를 세움.
- 1436년 정척에게 함길,평안,황해도의 지도를 제작하게 함. 납 활자 병진자를 만듦.
- 1437년 일성정시의 완성하고 다음 해에 장영실의 경영으로 흠경각이 설치.
- 1440년(세종 22년, 44세) 종루각 세움, 다음 해 측우기 제작, 양 수표 세움. 화초를 만들어 평안도와 함길도에 보냄. 다음 해에 측우의 제도를 확정.
- 1443년 세자 문종에게 서무를 섭행하게 함. 훈민정음 28자를 창제.
- 1444년 평해도와 함길도에 병서를 보내고, 다음 해에 화포 공장 장려책 세움.
-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 [훈민정음(해례본)]이 이루어졌음. 또 새 영조척으로 곡, 두, 홉의 제제를 정해 부피 측정의 제도를 확정.
- 1447년 새 화포를 만들고, 조선식 화포의 새로운 제도와 규격화된 양산 체제. 다음 해에 [총통등록]을 각도에 한 벌씩 보내고, 춘추관에 소장하게 함.
- 1450년(세종 32년, 54세) 음력 2월 17일(양력 4월 8일) 승하

세종대왕의 과학기술 관련 주요 업적

도량형 정비

도량형은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한 기준을 세워 사물을 측정하는 것이 생겨났으며, 고구려의 도성인 평양은 여러 가지 측정기구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계획 도시였다. 그러나, 나라가 혼란할 때마다 도량형은 무질서해졌다. 세종대왕은 박연 등에 명하여 길이, 부피, 무게를 측정하는 도량형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가지 척(자)과 되와 말, 저울, 황종율관 등은 도량형의 발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시각 측정 도구

물시계

세종대왕 때에는 앙부일구, 지평일구, 자격루, 옥루 등을 포함하여 10여 가지의 시계가 발명되었다.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앙부일구를 만들어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하였다. 자동 시보 장치가 붙은 물시계가 발명되었으며, 그 기술은 기계 장치의 발명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참조: "장영실 선현의 발자취 찾아서",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4)

독자적인 천문학

세종대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천문을 추정하여 계산하는 일이란 전심 전력해야만 그 이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계산된 일식과 월식의 시각과 분수(分數)가 비록 측정한 숫자와 맞지 않더라도 서운관으로 하여금 모두 기록하게 하여 뒷날에 대비토록 하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나라 독자적인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고대 수리 계산법에서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정리하여 "칠정산내편"을 만들었으며, 아라비아의 천문 계산법을 검토한 후 "칠정산외편"을 만들었다. 또, 천문 기상의 관측, 역서의 제작, 풍수지리에 관한 일을 서운관에서 맡게 하였다. (참조: "이순지 선현의 발자취 찾아서",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4)

기상 측정 기구

측우기와 수표

기상 측정 기구들을 만들었다 측우기는 원시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던 방법을 개선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구이다.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었으며, 수백년 동안 각 고을의 관리는 우리 나라의 각 지방에 내린 비의 양을 측정하여 기록해 두었다. 그 외에도 바람의 방향과 속력을 재는 풍기대, 계절의 변화와 24절기를 알려주는 규표 등이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농지 개발

태종 대왕 시대에는 주로 수리시설을 보완하는 정도였다. 세종대왕 시대에 이르자, 우리 나라 각지에서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을 찾아 가장 오래된 농사 책인 "농사직설"을 펴내고 이를 전국에 알렸다. 농사를 지어 거두어드린 곡식의 양은 조선시대 중 세종대왕 시대에 가장 많았다.

금속활자의 발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기술을 발전시켰다 활자를 이용한 인쇄는 평평한 나무판 위에 글자를 새기는 목판인쇄보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활자 인쇄 중에서도 금속 활자의 발명은 이미 12세기 고려시대에 이루어졌으나,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의 명에 의하여 금속 활자로 인쇄하는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는데 사용되었다. (참조: "이천 선현의 발자취 찾아서",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4)

우리나라 글 훈민정음

훈민정음

사람의 입 모양과 소리가 나는 원리를 이용하여 자음을 만들고, 동양 철학의 뜻을 담은 모음을 만들어 새롭게 글을 창제하였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수년 동안 연구하여 훈민정음을 만들고, 3년 동안 검사한 후, 1446년에 신하들 앞에서 반포하였다. 그 당시 백성은 거의 모두가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대왕 때 만든 "농사직설"을 읽을 수 있게 하려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이 필요했다. 예로 "농사직설"에는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를 훈민정음으로 기록하여 농민 모두가 농기구 이름을 쓰고, 말할 수 있게 하였다. (참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발자취 찾아서",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4)

인재의 등용과 집단 활동

세종대왕 시대에는 정인지, 정초, 이순지 등의 많은 학자들이 세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서운관에서 천체를 관측하고, 옛날 천문 서적을 연구하였다. 또, 자격루를 만들었던 이천과 장영실도 한때 서운관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서운관은 2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경복궁 안에 다른 하나는 궁의 밖에 있었다. 궁 밖에 세워져 있던 관천대는 높이 3.46m, 넓이 2.42㎡로 그 위에서 해시계를 놓고 시간을 재기도 하였다. 당시에 만들어졌던 관천대가 서울 가회동(지하철 3호선 안국역 주변)에 보존되어 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 시대 과학기술 발전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 두뇌집단이었다.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 세종대 과학기술사에 이름을 남긴 학자들은 적지 않다. 강희맹, 강희안, 권채, 김담, 김돈, 김빈, 김수온, 노사신, 박서생, 서거정, 성임, 신숙주, 신석조, 신장, 양성지, 유성원, 유효통, 윤회, 이순지, 이예, 정인지 등이 핵심 인물들이다. 그들은 집현전을 거친 학사들 99명 중 2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선현 관련 탐방지와 기념사업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세종대왕기념관

훈민정음 반포 510돌이 되는 1956년 10월 9일 한글날에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 하고 그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창설되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홍릉 동산에 세종대왕기념관을 세운 후, 구영릉의 발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54종 401책 발행, 한글 글자체 개발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2층에 위치하고 있다. (참조: "세종대왕기념관 과학 탐방",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3)

세종대왕 신도비

세종대왕 신도비

유형문화재 제 42호인 세종대왕신도비는 원래 문종 2년(1452)에 옛 영릉 터에 세워졌던 것이다. 1974년 3월에 신도비를 발굴하여 5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왔으며, 신도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전각을 세웠다. 신도비는 전분과 민신의 지도 아래 150여 명의 석공들이 2년 만에 제작한 것이다. 앞면의 비명은 정인지가 뒷면의 비음기는 김조가 지었고 글씨는 안평대군 용이 썼다.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

영릉

사적 제195호인 영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데, 이것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당초의 영릉은 세종 23년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서울에 있는 헌릉(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쪽 언덕에 쌍실로 조영된 능이었다. 오른쪽 석실은 세종의 수릉(壽陵: 생전에 미리 만들어두는 임금의 능)으로 삼고 왼쪽에 소헌왕후 심씨를 봉안했다. 그후 세종이 승하하여 문종 즉위년에 합장하니,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된 것이다. 구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혔는데, 묻힌 석물들은 1973년에 발굴되어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무인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이 서울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1975년 영릉 보수 정화사업을 추진하여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세종전'을 새로 짓고 능역을 정비하였다. 해시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등 각종 과학기구를 복원해 놓았으며 세종전에는 대왕의 업적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과학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릉(英陵)과 이웃하여 조선조 17대 임금이신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능인 녕릉(寧陵)이 위치하고 있어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참조: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 과학 탐방",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3)

세종대왕 시대의 과학기술

전상운 교수는 "15세기 과학사의 중심에 서 있던 세종 임금" 이라는 글(한국과학사학회 2004.10.연구모임)에서 세종시대 과학기술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맺는말을 하고 있다.

15세기 전반기인 조선 초에 이룩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그 질과 양에서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동아시아에서 더 나아가 세계사적인 시야에서 볼 때에도 유례가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5세기 전반기의 과학사는 조선왕조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정상으로까지 끌어 올려졌다. 과학의 역사에서 15세기는 세종의 시대이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제 우리나라나 동아시아의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세계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15세기의 주역으로서의 뚜렷한 위치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그 성과는 이슬람 과학과 서유럽 근대과학 사이의 역사적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주는 창조적 동아시아 과학의 업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세종시대에 "자주적 과학기술이 전개" 되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지속적인 정책이 전개 되었다는 것이다.

1. 과학성과 실용성을 존중하다.
2. 기술 자립과 개발을 위한 거시적인 노력을 기울이다.
3. 인재를 뽑아 기르고 두뇌집단을 움직이다.
4. 조직적인 공동연구를 해나가다.
5. 국책 과제로서의 과학기술이 정책적으로 전개되다.
6. 기술혁신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다.

우리는 과학정책과 과학교육을 어떻게 하면 세종시대와 같이 세계적인 과학문화 창달의 선진국이 될 수 있는가?

측우기의 탐구

측우기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의 감사(監司)가 비의 양을 측정하여 알리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으나, 토양 성분이 습하거나 건조하고, 비가 흙속으로 스며들어 비가 온 양을 알기 어려우니, 서운관(書雲觀)에 대를 올리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지름은 8촌이 되게 하여, 대 뒤에 올려 놓고 비를 받아, 서운관의 관원이 비가 온 양을 깊이로 측정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물 속에 큰 돌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돌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고리로 돌을 고정시켜 척,촌,분수(길이의 단위임)를 기둥 위에 새기고, 호조의 관리 낭청(郞廳)이 비가 올 때의 물의 깊이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漢江邊)의 큰 돌 위에 푯말을 세우고 척,촌,분수를 새겨, 도승(渡丞)이 이것으로 물의 깊이를 측량하여 호조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며,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비의 양 측정과 기록

측우기를 만들기 이전에는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깊이로 비가 온 양을 측정하였다. 이 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운관에서 받침대를 만들고 비의 양 측정과 기록을 깊이 2자(약 42cm), 지름이 8치(약 16.8cm)의 원기둥 형태의 철 그릇을 만들어 받침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서운관의 관리로 하여금 그 깊이를 재서 알리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의 각 관청에서는 서울에서 만든 그릇을 본떠서 사기나 옹기 그릇을 써서 관청의 뜰에 놓아두고 수령이 물의 깊이를 재서 감사에게 보고케 하여 감사가 통계를 내어 보고하였다.

빗물을 특정한 그릇에 받아서 그 깊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창안한 사람은 안평대군이었다. 그러나, 측우기의 발명은 서운관에 속해 있던 여러 학자들의 공동 연구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측우기는 세종 23년(1441년) 가을에 처음으로 발명되었으나,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드러나서 다음 해인 세종 24년(1442년)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시행 단계에 들어서 개량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해 5월 8일에 그 구체적 방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원통형 그릇을 '측우기'라고 이름 지어졌다.

비가 오면 측우기에 빗물이 담기게 되는데, 측우기에 모아진 비의 양을 주척을 이용하여 측정하였다. 아울러 비가 시작한 때, 날이 갠 때, 빗물의 높이를 정확히 기록하였다. 이렇게 세종대왕 때의 과학자들은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의 측정을 제도화함으로써, 15세기 전반기에 이미 자연 현상을 수량적으로 측정하여 기록하고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기상학에 있어서의 과학적 방법을 수립하였다.

측우기의 높이가 너무 낮으면 빗물이 흘러 넘치고, 너무 깊어도 비의 양을 재는데 불편한 점이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측우기의 높이를 정하였을까?

현대 측우기는?

우량(雨量)의 크기는 일정한 면적 위에 내린 총우량을 그 면적으로 나눈 깊이로 표시한다. 우량을 측정하는 기구를 우량기라 하며,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보통 우량기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우량기이다. 보통 우량기는 지름 20cm, 높이 60cm의 상단에 개방된 원통형 구리관 혹은 아연 도금 철관으로서 이 관 상단의 내부에 깔때기 모양의 수수기를 넣어 빗물을 받은 다음 이를 눈금이 든 유리 우량 측정관에 부어 측정하게 된다. 만약 직경이 4cm인 우량 측정관을 사용하면 수수기 단면적의 1/25이므로 깊이를 25배 확대해서 읽을 수 있다. 우량 관측시간은 매일 1회 오전 9시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의 하루 동안 온 비의 양으로 측정된다. 그 양이 0.1㎜이하일 때는 무강우로 취급한다.

보통 우량기

보통 우량계로 측정되는 일강수량 및 월강수량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하천 범람에 의한 홍수 해석 및 기타 여러 가지 올바른 해석을 위해 짧은 시간 내에 발생하는 호우의 강도 및 지속시간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우량을 계속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자기우량계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보통 기계적 조작에 의하여 펜이 방안지 상에서 우량의 시간적 변화를 추적토록 한다.

현재 사용되는 우량기를 보면 땅 속의 용기에 빗물을 받아서 강우량을 측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눈이나 우박이 왔을 때 이를 어떻게 잴까?

활동: 강우량 재어 보기

여러 모양의 용기로 강우량을 재어 봅시다.

준비물 : 여러 가지 모양의 투명한 용기(원통모양의 용기,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용기,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용기), 물뿌리개, 30cm자

여러 가지 모양의 용기

- 비가 오는 날 평평한 곳에 여러 가지 모양의 용기를 놓고 빗물을 받는다. 이 때, 용기가 쓰러지지 않도록 잘 받쳐 놓는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실험할 경우는 용기를 평평한 곳에 모아 놓고 물뿌리개로 물을 뿌린다.
- 어느 정도 물이 차면 뚜껑을 덮거나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는 것을 중지하여 빗물 받기를 끝낸다.
- 30cm자를 가지고 각 용기에 담긴 빗물의 양을 잰다.

물 뿌리기

결과와 고찰

- 용기에 담긴 물의 높이
- 물의 높이가 높은 것과 낮은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용기의 모양과 관련지어 설명해 봅시다.
- 어떤 용기로 강우량을 재는 것이 편리한가?
-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용기에 고인 물의 높이는 원통형 용기의 빗물의 높이와는 다르다. 이 용기에 고인 물을 이용하여 실제 강우량을 알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일주일간의 강우량 막대그래프를 만들어 봅시다.

측우기가 중국의 발명품으로 둔갑되다니!

측우기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우량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나라인 중국의 과학사 학자들이 측우기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측우대의 하나에 '건륭(乾隆) - 중국의 연호'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측우기를 만들어 조선에 보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옛 문헌 어디에도 누가 어떤 모양과 크기의 측우기를 만들어 강우량을 측정했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조상들은 우리의 독자적인 연호를 만들지 않고 중국의 연호를 써왔다. 이 사실을 중국의 과학사 학자들이 모를 리 없건만 자기들 입장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 문화유산을 소홀히 하는 동안 세계 속에서 측우기가 중국의 발명품으로 둔갑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문화교육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