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선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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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세종시대의 기계과학 기술자이며 과학기술 행정가

이천은 누구인가?

이천

이천(1376~1451)은 고려 우왕 2년에 경상도 예안(지금의 안동 도산면)에서 전법판서인 아버지 이송과 어머니 곡성 염씨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백곡(栢谷)이라 했고 본관은 예안이씨(禮安李氏)이다. 13세 되던 해 외숙이 난을 일으켜 집안이 어려워지고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다행이 어떤 산사의 중이 이천과 그의 아우를 불쌍히 여겨 숨겨 주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총명한 그는 18세 되던해에 정7품 벼슬에 임명되었다. 28세 되던 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45세에는 우군 부절제사로서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63세에는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을 회복 하였다. 그 후 1451년(문종 원년) 76세로 별세할 때까지 변방과 수도를 오가며 여러 면에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천 선현은 세종시대의 기계 과학자이며 출중한 과학기술 행정가라 하겠다. (참조: 김호(2004), 세종이 총애한 최고의 테크노크라트 백곡 이천, 이 달의 과학기술 인물 세미나 2, 한국과학사학회)

이천 선현의 과학기술 업적

1421년(세종3년)에 이천 선현은 공조참판으로서 당시 금속활자였던 계미자를 개량하여 경자자를 만들었다. 이를 이용하여 기존에 하루 두서너 장 찍어내던 것을 20여장으로 늘릴 수 있었고, 10여년 후에는 발전된 기술을 응용하여 더 아름다우면서도 하루 40여장을 찍어낼 수 있는 청동 금속활자 갑인자를 만들었다. 그 후 청동 활자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찍어 내었다.

1422년(세종4년)경에는 저울추 등 도량형기기를 표준화하고 백성들이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국가의 표준을 세우는데 기여하였고, 2년 후에는 악기도감의 조제가 되어 박연과 더불어 금, 슬, 대쟁 등 많은 악기를 제작하고 음률을 조정하였다.

1432년(세종 14년)부터 1437년 사이에 이루어진 천문 관측기기와 시간 측정기기 제작 사업에서 지중추원사로 있던 이천은 천문 분야의 책임자가 되어 훌륭히 완수하였으며, 해시계, 자격루 등의 제작에도 직접 관여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경복궁에 천문대인 간의대를 건설하고 그곳에 대간의, 규표 등을 설치하였고, 또한 정초, 정인지, 김빈 등과 함께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그 후 10여년 후에는 화포의 일종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개발하였다. (참조: 박성래 외(2003),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에 관한 인물 및 자료 조사 연구,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천 선현의 발자취를 찾아서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에 "예안이씨 대종회"가 있는데, 이천 선현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http://yeanyi.or.kr/)

한 건물에 있는 유서각과 추원각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에는 유서각과 추원각이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건물에 있다. 유서각에는 이천 선현이 육진을 개척하였을 때 세종대왕이 내리신 글(諭書)이 새겨진 목각판이 걸려 있고, 추원각에는 정조 임금 시대의 학자 조병집이 위대한 과학자로서, 국토를 개척한 장수로서 이천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한 글이 새겨진 비석(實記碑)이 있는데, 건립 년도는 대략 1912년으로 추정된다. 그 옆에는 1년에 한 번씩 이천 선현을 비롯한 조상님들께 제를 올리는 숭사재가 있다. 그 옆으로 30 m 정도 떨어진 산기슭에는 1993년 4월의 문화인물로 이천 선현이 지정되었을 때 세워진 이천 선현의 설단이 세워져 있다. 경상도 안동 예안에는 그의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어 있다. 이천 선현의 묘는 경기도 양주 근처라고 하나 명확한 위치를 모른다.

국립서울과학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천 선현의 영정 사진 및 업적 관련 사진과 모형품이 전시 되어있다. 인쇄술에 대한 업적은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알 수 있으며,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에는 천문관측의기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참조: 남경운 외(2004), "이천 선현의 발자취를 찾아서", 과학문화교육연구소)

문헌 속에 기록된 이천 선현의 행적

세종실록 권16에 정확한 저울이 제작되어 반포를 명하는 글, 권61에 이천 등이 혼천의를 올릴 때의 상황 글, 권65 에 세종대왕이 갑인지 개발을 칭찬하시는 글, 권78에 우리 실정에 맞는 대포의 개발을 요청하는 글이 있으며, 문종실록 권10에는 이천의 죽음에 대하여 평하는 글이 있다.

고인쇄기술에 공헌한 이천

고인쇄 활자 주조 과정

미국의 월간 라이프(LIFE)지가 선정한 지난 1천년간의 1백 개의 사건 중 금속활자인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1447년에 최초로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성경을 찍어 내었다지만. 우리는 1377년에 청주목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는 그 보다 70여년전, 이천 선현의 갑인자 금속활자 개발도 구텐베르크보다 약 10년 이상 빠르다.

조선 태종은 주자소를 설치하고 금속 동활자인 계미자를 제작하여 책을 찍어 내어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였다. 그러나 계미자는 하루에 두어 장 찍어내지만, 세종시대 이천 선현이 개발한 경자자 인쇄 기술로는 20여장, 갑인자로는 40여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기

- 계미자보다 경자자가, 경자자보다는 갑인자가 어떻게 해서 더 많이 찍어 낼 수 있었을까? ?우리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재료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 목활자본과 금속활자본의 구별을 어떻게 할까?
- 금속활자는 몇가지 금속을 섞어서(합금) 사용하는데, 어떤 종류의 금속이 섞여있는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옛날에 어떻게 그러한 금속들을 섞어서 주조했을까?
- 금속활자를 사용할 때 중요한 기술적 문제는 먹과 종이이다. 수성먹은 나무활자에 적당하지만 금속 표면에서는 뭉치기 때문에 인쇄가 잘 되지 않는다. 우리의 선조들은 무엇으로 어떤 먹을 만들어 썼을까?
- 서양은 오랫동안 두꺼운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썼다고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얇고 질기며 천년이상 가는 한지를 만들어 썼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을까?

금속활자 주조 과정의 숨구멍과 연적의 탐구

금속활자 주조 과정에서 쇳물을 부어 넣을 입구와 쇳물이 잘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숨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공기의 흐름을 고려한 예를 찾아봅시다.

청화백자 연적과 구멍만 나타낸 그림

금속 활자 주조과정에서 주물토를 채워 넣는 단계에, "평평한 목판이나 철판 위에 거푸집을 장치한 후 밀랍으로 만든 어미자 가지를 넣고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주물토를 채워 넣는다. 이때 쇳물을 부어 넣을 입구와 쇳물이 잘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숨구멍을 만들어 놓아야한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연적에 물을 어떻게 하면 잘 담을까? 연적에는 구멍이 몇 개 있는가?

야쿠르트 병의 껍질에 구멍을 하나 뚫고 거꾸로 뒤집으면 쏟아지는가? 왜 그런가? 잘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갑돌 갑순

갑돌이와 갑순이는 그림처럼 수조에 담긴 물을 페트병에 담으려고 한다.

누가 더 쉽게 물을 채울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 실제로 해 봅시다. 이제, 다 먹은 야쿠르트 병에 물을 담아 봅시다. 어떻게 해야 물이 잘 채워지는가?

페트병 속에 넣은 풍선 불기 활동을 해보고,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해 봅시다.

준비물: 페트병(500ml 정도의 크기), 송곳, 풍선

해보며 생각하기
- 페트병 속에 풍선을 넣은 후, 병 주둥이에 풍선 끝을 제쳐 끼우고 입으로 힘껏 불어 봅시다. 어떻게 되는가? 왜 그런가?
- 송곳으로 페트병 바닥에 구멍을 뚫고 다시 한번 풍선을 입으로 힘껏 불어 봅시다. 어떻게 되는가? 왜 그런가?
- 풍선을 입으로 불어 풍선을 부풀린 다음 바닥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입을 떼어봅시다. 풍선은 어떻게 되는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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