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선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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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철(李源喆)
천문기상학을 개척한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 어떤 분이신가

이원철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로 천문기상학을 개척한 우남(羽南) 이원철 박사(1896~1962)는 서울 다동에서 이중억(李重億)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탁월한 기억력과 신속한 수치계산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학교에 입학 전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이후에도 틈나는 대로 한서를 탐독해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선린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하였는데, 연희전문 재학 중에도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3학년 때부터 2년간 통계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연희전문의 수학교수인 선교사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10분 만에 풀어냈다는 것이다. 졸업 후에도 2년 (1919~1921)간 연희전문학교의 수학강사로 재직했다. 4학년 때 수물과에 개설되었던 4학점의 천문학 과목을 물리학자 벡커(A. L. Beker) 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처음 공부하였다.

이원철의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였는데도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벡커 교수의 후원과 미시간 대학의 교수이자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천문학자 루퍼스(W. E. Rufus)의 주선에 의해 1921년 앨비온(Albion)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앨비온 대학에서 이학사를 취득(1922)하고 미시간 대학에서 석사학위(1923)와 박사학위(1926)를 취득하였다. 이것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이학박사의 탄생이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1926년부터 교수로 지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에서 진행했던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연구 대신 교육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원철 박사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고등교육 수준에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로써, 연희전문학교의 자랑거리였다. 또한 "원철성"과 관련해 유명해진 이원철 박사는 서울 YMCA에서 정기적인 대중강연 등을 통해 과학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섰다.

1937년 총독부의 탄압정책에 따라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류 되어 투옥되었다. 그 후 출옥하기는 하였지만 다시 교단에 서지는 못했다.

해방이 되자 이원철 박사는 관상대를 복구하여 운영하는 일에 매진했다. 관상대 초대 대장으로 15년을 넘게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과 관련된 인력을 키우고 제반 제도를 확립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우리나라 기상학과 천문학 양 분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관상대 대장 재임 중에 잠시 인하공대 초대 학장과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61년부터 1963년 작고할 때까지는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의 중책을 맡았다.

과학기술 관련 주요 업적 및 영향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로서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그의 연구는 해외과학학술지에 실렸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천문학계에는 맥동설이 주창되었는데, 별의 맥동이란, 별이 주기적으로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면서 맥동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들에게는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밝기 변화가 생긴다는 이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원철이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제출한 것은 1926년이었다. 이 논문은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정교한 분광학적 관찰과 계산을 통해 그 별이 맥동변광성임을 밝힌 것이다. 맥동변광성은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변광성의 하나로, 별이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며 밝기가 변하는 것이다. 이 논문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잡지 등에 '원철성'으로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그가 독수리자리 에타별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고,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원철 박사는 서울 YMCA가 일반인을 위한 교양강좌를 개설할 때 과학 강좌를 맡았다. 원철성의 발견자로 잘못 알고 있었지만, 어떻던 그가 진행하는 '목요 강좌'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이 강연은 과학의 대중적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잘못 알려진 "원철성-원철스타"

1929년 11월에 발간된 대중종합지 三千里 3호는 "'원철성' 발견한 세계적 천문학자 이원철 박사"라는 제호의 기사를 싣고 있다.

지금 경성시외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계신 삼십이세의 소장 교수 이원철씨는 실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문학자임은 아마 제나라인 조선보다도 구미 각국의 학자사회에서 더 많이 알 것입니다. 씨의 학위는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받은 이학박사인데 원래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할 만큼 씨의 재질은 수리방면에 단연 일두지를 나타낸 바 있어 일찌기 연희전문학교의 학생시대에는 1학년 때부터 졸업당시까지 항상 수석으로 시종하야 ...

또한 1932년의 三千里는 그에 대해 다시 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는다.

(이원철 교수가) '원철성'을 발견하여 세계천문학계에 절대의 공헌을 하고 미국내 학자들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은 일찍이 우리 신문계를 통하여서도 널리 알려진 바이거니와 ... 연전(延專)에 와서는 일반 학생들에게 비상한 환영을 받으며 연전 수물과의 존재가치가 전혀 씨에게 달려있는 감이 불무하다. 연전의 세 가지 보물 중에 수위의 영예를 걸머지는 씨로서 ... 조선 학계에 있어서도 씨의 존재는 발군의 지위를 가져야한다는 것이 일반의 정평이다. ...

연희전문학교의 내실 있는 운영과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천문학사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루퍼스에서 벡커, 그리고 이원철로 이어지는 연희전문학교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였다. 연희전문학교 건물 옥상의 임시천문대에는 15cm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원철 박사는 이 망원경을 이용해서 실제적인 천문학 강의를 할 수 있었다. 1928년 연희전문 졸업앨범에는 이원철 박사가 이 망원경 앞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하지만 이 망원경은 1942년 일제가 전시물자로 징발해가고 말았다.

연희전문학교의 과학부장으로서 12년간 수물과 연구실을 관장하면서 "과학연구"지를 간행했고, 체육부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연희동문회보" 제2호(1934)에 "총사령관 이원철 박사 운운"한 것을 보면 꽤나 동분서주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학교와 후학들의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물질의 희사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학교 박물관에 경대 1점과 연상 1점을, 도서관에 희귀한 한서 16권을 기증한 바 있다.

1935년 이원철의 스승이었던 미시간 대학의 루퍼스 교수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조선에 돌아와 1년간 머물면서 천문학에 관한 우리의 옛문헌과 유적을 조사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이원철 박사는 이 과정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스승의 연구를 도왔다. 이 보고서 "한국천문학사"는 고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 천문학을 개관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후학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천문학사 연구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 보고서의 말미에서 백낙준, 정인보와 함께 이원철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나타냈는데, 이원철 박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항상 도움을 주었고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고 도서관과 사적지를 함께 답사하는 일에 최대의 감사를 표하고 있다. 34장의 사진 중에서 가장 마지막 사진은 옛 북부 광화방(廣化坊) 관상감 자리(현 현대건설 본부 건물)에 있던 관천대 앞에서 이원철과 루퍼스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 덕분에 오늘날 이 관천대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6년간 국립관상대 초대대장으로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기관 과학회 창설과 그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원철 박사는 해방을 맞이하자 연희전문의 재건에 참여하는 한편, 관상감을 부활시키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관삼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35년 루퍼스의 전통 천문학에 대한 연구를 도왔던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상감을 비롯한 천문·기상에 관한 유물 및 문헌을 접하면서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게 된 그는 1945년 9월 22일 미 군정청 학무국 기상과 과장이 되었으며, 10월 2일 관상대 복구 결정을 얻어내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재조직하고 자신이 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10월 15일 관상대의 부족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관상대 실습학교를 개설하여 중학졸업자 35명을 등록시켜 교육과 훈련을 시켰다. 이처럼 빠른 시간에 관상대 복구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이원철의 적극적인 노력과 그의 학문적 경력에 대한 군정청 관계자들의 신뢰와 기상자료에 대한 필요성 등이 결합된 결과였다.

관상대 천문과의 유일한 직원인 천문과장과 함께 자신이 직접 역계산에 나서 역서(曆書)를 편찬해서 배포했다. 역서는 음력날짜, 월령, 일월식, 조석, 24절기의 시각, 매일의 일월 출몰 시각 등을 계산한 결과를 담고 있는 책으로서 국민들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될뿐더러, 조선시대의 관상감이 담당한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서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태양력을 정식으로 채택한 것은 고종 33년(1896)이었으므로 한일합방보다 14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람들은 일본의 영향으로 할 수 없이 음력을 버리게 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었고, 농사철을 알아내는데 필요한 24절기가 음력으로만 계산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음력으로 일상생활을 택일하는 일은 마치 일제에 항거하거나 분풀이를 하는 행위로까지 비약했다. 여기에 대해 이원철 박사는 어디를 가나, 또 누구를 만나게 되던지 화젯거리와 토론 주제로 음력이 과학적인가를 거론하였다.

한편 이원철 박사는 관상대 직원을 중심으로 1947년 3월 한국기상학회를 조직했다. 현재의 한국기상학회는 1963년 12월 창립되었으니 이원철이 조직한 한국기상학회는 현재 기상학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1958년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기상학회는 서울시 서대문구 송월동 1번지의 중앙관상대 내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회장은 이원철, 부회장은 서상문, 김진면이 맡고 있었다. 회원수는 170명에 달했다. 당시의 여건상 학회지를 펴내는 등의 본격적인 학술활동을 벌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기상학을 확고히 자리 잡게 하려했던 이원철 박사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인하공대 초대학장과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 및 사회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원철 박사는 인하공과대학 설립과정에 참여, 초대학장으로 선임되어 1954년부터 65년 말 까지 신설대학의 기초를 닦았다. 인하공대는 과학기술 분야의 지도적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하와이 이민동포의 자원 등으로 설립된 학교로, 학계에 존경받는 전형적인 과학자로서 이원철이 학장으로 선임된 것이었다.

또한 1952년부터 연희대학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으며,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통합과정에 합동위원으로 참여했다. 1961년에는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비록 강단에 서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맡으면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이원철 박사는 YMCA 재단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자기의 재산을 YMCA에 기부함으로 마지막까지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이원철 박사의 발자취 찾아서

묘소

이원철 박사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 147-4에 있다. 이 일대는 박사의 가문인 우계(羽溪)이씨가 대대로 살아왔던 곳이다. 자손이 없었던 이 박사는 이 일대의 토지(3만 6천평)를 모두 서울 YMCA에 기부하였다. 그래서 YMCA에서는 박사의 뜻을 기리고자 매년 8월28일에 이곳을 찾는 행사를 갖고 있다. 갈월동의 저택과 대지 170평은 그의 부인이 사용하다 서울 YMCA에 기증했다. 이것은 후에 강남지회 회관 건립에 쓰였는데, 1986년 서울 논현동에 개관한 YMCA 강남지회 건물의 강당은 우남 이원철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우남홀"로 명명되었다.

국립서울과학관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국립서울과학관 4층에는 2003년부터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이 전당은 과학을 중시하고 과학문화가 활짝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우리 과학기술인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항구적으로 전시, 보존하고자 건립되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인 중 14인을 선정하여 각각의 부스에서 업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원철 박사도 그 중 한 부스를 차지하고 있으며,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기상관측소

기상청 서울기상관측소(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1번지)는 이원철 박사가 근무했었던 국립중앙관상대 자리로,1933년 1월부터 기상관측을 시행하고 있다. 국립중앙관상대가 기상청으로 명칭이 바뀌고, 기상청 청사가 1998년 12월에 보라매공원 쪽으로 이전되었지만 서울지방 기후자료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상기상관측은 이곳에서 계속 시행하고 있다. 이 곳의 건물들은 이원철 박사 재직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낡고 변형되었지만 박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일기예보에서 접하는 서울의 최저기온 및 최고기온, 풍향, 풍속 등은 모두 이곳에서 측정한 자료들이다.

연세대학교 천문우주학 교육과 어린이 천문대

연세대학교에서의 천문우주학 교육은, 1915년 루퍼스 박사가 연희전문학교 개교와 함께 천문학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이원철 박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현대 천문우주학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많은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당시 수물과(數物科) 초대 과장은 베커였는데, 1919년의 연희전문학교 1회 졸업생 22명 중 4명이 수물과 졸업생이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이원철 박사였다.

이와 같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현재 자연과학부 천문우주학 전공 과정에서는 항성천문학, 항성진화론, 천체물리학, 은하천문학 및 관측우주론 등의 분야에서 세계 수준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로켓 및 인공위성과 관련된 우주과학, 우주동력학 및 위성영상처리론과 같은 응용천문학 분야의 연구에서도 국내 학계를 선도하고 있다. 특히 최근 과학기술처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창의적연구진흥사업은 연세대학교 천문우주학과에서 제출한 자외선우주망원경 계획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망원경을 연세대학교 천문우주학과 연구팀이 개발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천문우주학과에서 운영하고 있는 천문대 본부는 연세대학교 서울캠퍼스 내(산학협동관 503호)에 있고, 관측은 주로 일산관측소에서 이루어진다.

연세대학교 천문대 일산관측소(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산60-5)는 61cm 반사망원경을 보유하고 있으며 관측이 주로 이루어지는 연구시설이다. 여기서는 연구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천문학의 대중보급과 일반교육을 위한 적극적인 과학대중화사업의 일환으로 '어린이천문대(http://astrocamp.net)'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원철 박사의 뜻과 맥을 이어오는 사업이라 하겠다.

이원철 박사 일화

어릴 때부터 탁월한 기억력과 신속한 수치계산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는 이원철 박사는, 중앙관상대장으로 재직 중에는 필요한 전화번호를 모두 암기하고 있어 일상 업무 수행 시에 전화번호부를 찾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수 십 자리까지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고 한다. 연희전문 재학 중에도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수학교수인 선교사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10분 만에 풀어냈다는 것이다.

교육학자 윤태림(尹泰林) 교수가 중학생 시절의 한 친구가 이원철 박사의 조카였다. 이 때 이원철 박사는 미혼으로 형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호기심 많던 중학생인 그들은 미국에서 박사가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궁금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조카의 집에 가서 놀았는데, 학생이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고 이원철 박사에게 야단을 맞기 일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가끔 이박사가 없을 때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그의 책들을 구경했다고 한다. 방 한 쪽 벽에 영어로 쓰인 책이 꽉 차 있어서 보기만 해도 질렸다고 한다. 궁금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원철 박사가 방에 있다는 것을 알면, 문틈으로 그가 어떻게 지내는 지를 훔쳐보기도 했는데, 언제나 바른 자세로 골돌히 책을 읽고 있거나 무엇인가 손놀림을 하는 모습이 경건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철없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이상이 있었고 하나의 인물을 통해 무언의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 나일성, 사막에서 홀로 몸부림친 이원철, 이달의 과학기술인물세미나 8, 한국과학사학회.2004.8)

속담으로 일기예보?

일상생활에서 어른들의 말씀에는 경험에서 얻어진 일기예보의 속담이 있다. 다음과 같은 속담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가?

- 청개구리가 낮은 곳에 있으면 날씨가 맑다.
- 아침 무지개는 비가 올 징조다.
-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 아침에 보이는 거미줄에 이슬이 맺히면 날이 맑다.
- 하늘이 유난히 맑으면 큰 서리가 내린다.
- 아침에 안개가 끼면 날이 맑다.

천문우주학 분야!

우주개발 기술이 한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우주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 천문우주학은 21세기 초반의 가장 전망 있는 전공분야로서 그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천문우주학 전공자들은 주로 천문학과 우주과학 관련 국내외 대학과 연구소인 천문우주과학연구소, 항공우주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시스템공학연구소, 표준과학연구원, 전파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국립지리원, 원자력연구소 등에서 교수 및 연구 과학자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천문우주학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또한, 정부와 대기업체의 우주개발 계획에 따라 인공위성 관련 기업체인 삼성항공, 대우중공업, 한라중공업, 현대전자, 현대우주항공, 대한항공, 한국통신 위성사업단 등의 사업 확대로 졸업자들의 진출이 급격히 향상되고 있으며, 영상처리 및 전산관련 분야 등으로의 진출도 매우 활발하다. 특히 많은 수의 연구자들은 해외 명문 대학 및 연구소인 NASA, 허블 우주망원경연구소 등에서 연구원 및 교수로 활동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연세대학교에 과학기술처 지정 우주망원경 연구단이 발족됨으로써 참신하고 젊은 인재들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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