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05-07-25 (Vol 2, No 7)

로그인 | 웹진 | 한마당

먼젓글  |  다음글  |  차례

국제화와 토착화 연구개발 활동

이원철(李源喆), 어떤분이신가

- 천문기상학을 개척한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 -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로 천문기상학을 개척한 우남(羽南) 이원철 박사(1896~1962)는 서울 다동에서 이중억(李重億)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탁월한 기억력과 신속한 수치계산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학교에 입학 전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이후에도 틈나는 대로 한서를 탐독해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선린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하였는데, 연희전문 재학 중에도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3학년 때부터 2년간 통계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연희전문의 수학교수인 선교사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10분 만에 풀어냈다는 것이다. 졸업 후에도 2년 (1919~1921)간 연희전문학교의 수학강사로 재직했다. 4학년 때 수물과에 개설되었던 4학점의 천문학 과목을 물리학자 벡커(A. L. Beker) 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처음 공부하였다.

이원철의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였는데도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벡커 교수의 후원과 미시간 대학의 교수이자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천문학자 루퍼스(W. E. Rufus)의 주선에 의해 1921년 앨비온(Albion)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앨비온 대학에서 이학사를 취득(1922)하고 미시간 대학에서 석사학위(1923)와 박사학위(1926)를 취득하였다. 이것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이학박사의 탄생이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1926년부터 교수로 지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에서 진행했던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연구 대신 교육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원철 박사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고등교육 수준에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로써, 연희전문학교의 자랑거리였다. 또한 “원철성”과 관련해 유명해진 이원철 박사는 서울 YMCA에서 정기적인 대중강연 등을 통해 과학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섰다.

1937년 총독부의 탄압정책에 따라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류 되어 투옥되었다. 그 후 출옥하기는 하였지만 다시 교단에 서지는 못했다.

해방이 되자 이원철 박사는 관상대를 복구하여 운영하는 일에 매진했다. 관상대 초대 대장으로 15년을 넘게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과 관련된 인력을 키우고 제반 제도를 확립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우리나라 기상학과 천문학 양 분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관상대 대장 재임 중에 잠시 인하공대 초대 학장과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61년부터 1963년 작고할 때까지는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의 중책을 맡았다.

과학기술 관련 주요 업적 및 영향

1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로서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그의 연구는 해외과학학술지에 실렸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2. 연희전문학교의 내실 있는 운영과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천문학사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3. 16년간 국립관상대 초대대장으로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기관 과학회 창설과 그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4. 인하공대 초대학장과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 및 사회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원철 박사 일화

어릴 때부터 탁월한 기억력과 신속한 수치계산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는 이원철 박사는, 중앙관상대장으로 재직 중에는 필요한 전화번호를 모두 암기하고 있어 일상 업무 수행 시에 전화번호부를 찾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수 십 자리까지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고 한다. 연희전문 재학 중에도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수학교수인 선교사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10분 만에 풀어냈다는 것이다.

교육학자 윤태림(尹泰林) 교수가 중학생 시절의 한 친구가 이원철 박사의 조카였다. 이 때 이원철 박사는 미혼으로 형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호기심 많던 중학생인 그들은 미국에서 박사가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궁금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조카의 집에 가서 놀았는데, 학생이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고 이원철 박사에게 야단을 맞기 일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가끔 이박사가 없을 때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그의 책들을 구경했다고 한다. 방 한 쪽 벽에 영어로 쓰인 책이 꽉 차 있어서 보기만 해도 질렸다고 한다. 궁금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원철 박사가 방에 있다는 것을 알면, 문틈으로 그가 어떻게 지내는 지를 훔쳐보기도 했는데, 언제나 바른 자세로 골돌히 책을 읽고 있거나 무엇인가 손놀림을 하는 모습이 경건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철없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이상이 있었고 하나의 인물을 통해 무언의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 나일성, 사막에서 홀로 몸부림친 이원철, 이달의 과학기술인물세미나 8, 한국과학사학회.2004.8)

첨부
교육마당이원철원고.hwp

박승재
과학문화교육연구소

과학문화교육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