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05-10-25 (Vol 2, No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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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과학교육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은 어떨까?

# 2005년 6월 말. 서울00초등학교 6학년 3반 교실. 6교시 창의적 재량활동 시간. #

교실 곳곳이 물바다를 이룬다. 4명이 한 모둠을 이룬 아이들의 책상에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대용품들이 즐비하다. 운 좋게 수조를 가져간 모둠도 있는가 하면, 자신이 먹던 물병이나 물병에 딸린 컵을 꺼내 놓은 모둠이 가장 많다. 작은 클립 통을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다. 대부분의 모둠에서는 흰색 안개가 오르고 있다. 가지각색의 통을 넘실거리는 안개에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쳐대는 아이들도 있다.

광훈 : 선생님, 조금만 더 주실 수 없어요?
교사 : 이제 정말 조금이야. 이 부스러기라도 쓸래?
광훈 : 네. 그거라도 주세요.

얼른 드라이아이스를 받아들고는 뛰어 들어가는 광훈이 옆으로, 광규네 모둠은 드라이아이스를 넣고 뚜껑을 닫은 필름 통이 튀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준수, 태희 : 꺄악!
광규 : 히히히. 놀랐지? 야, 이거 잘 되는데.
다운 : 선생님 우리 모둠 거는 왜 안 돼요?

이윽고 필름 통이 천정이 부셔져라 튀어오르자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난다. 다운이네 모둠은 뚜껑이 헐거워진 필름 통을 들고 와서는 왜 안 돼냐고 자꾸 물어댄다.
정신없이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끼이이이이이이- 시끌벅적한 아이들 속에서 이상한 금속음이 났다. 무슨 소리였을까? 잠시 끊겼던 소리는 다시금 이어진다. 끼이이이이이이-. 1분단 쪽 아이들의 시선이 순간 다운이네 모둠 쪽으로 쏠렸다.

다운 : 선생님, 이거 봐요. 이거 왜 이래요?
교사 : 뭐-
다운 : 이렇게 못 위에 놓으면요.
승범 : 야, 야, 저거 좀 봐. 소리가 난다.
교사 : 어, 신기하네. 소리가 나네.
지연 : 야, 우리도 해보자.

책상 위에 튀어 나와 있는 금속 못 머리에 드라이아이스가 얹히자 작지만 뚜렷한 소리가 난다. 몇몇 아이들은 손으로 살짝 눌러보기도 했다. 소리는 조금 작아지면서 높아지는 듯이 들린다. 금속 이외의 물건에 놓아 보이는 아이들도 생겼다.

승범 : 선생님, 이게 왜 소리가 나는 거예요?
교사 : 글쎄. 왜 그렇지? 뭔가 떨리는 게 있다는 건데.
승범 :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니까, 어, 그러니까, 이산화탄소가 새면서 나는 건가?

야단법석은 6교시가 끝나는 종이 치고 나서도 이어졌다. 집에 가자고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책상 위의 한 편에서는 부글부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필름 통 튀어오르는 소리, 아이들 비명 소리, 그리고 끼이이이 대는 금속성 소리들이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드라이아이스를 깨보는 아이, 드라이아이스 무더기 속에 연필을 집어넣은 아이, 물 컵 주변에 얼음이 얼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아이….
간신히 정리하고 집에 갈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는 이미 20분 정도나 시간을 넘긴 후였다. 그리고 아직도 몇몇은 컵에 드라이아이스를 들고 있었다.

* * *

‘아이들에게 시간을 선물해 줄 수 없을까?’
언제인가부터 필자의 머리 속에 항상 맴돌고 있는 말이다. 흔히 ‘웃자란다.’라는 말을 쓴다. 쓸데없이 보통 이상으로 많이 자라 연약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웃자란 경우는 그 열매가 튼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빨리 자라게 한다고 거름을 너무 많이 주는 것이 오히려 웃자라게 해서 튼실한 과일이 열리는 데 지장을 주기도 한다. 가끔 아이들을 볼 때면 이 말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학생들이라고 해서 교과 진도와 시험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수업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교과 내용, 방과 후 학원에서 부과되는 이중 삼중의 과제와 시험은 아이들을 그저 ‘좇아가기’에도 벅찬 나날 속에 묻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지금 웃자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 시간이라고 예외일까? R. Driver(1983)는 그의 책 The pupil as scientist에서 교과서 실험에 급급해 하면서 실험실 정리로 정신없이 마무리되는 과학 시간을 비판한 바 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초등학교의 과학 시간은 어떨까? 적어도 필자 주변의 과학 수업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중 고등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험활동이 활발하고 아이들의 흥미도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교사들은 교과서에서 제시된 내용을 가능하면 모두 충실히 다루려고 하고,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아이들은 분명 한 차시의 실험을 하고 넘어가지만, 그 실험이 갖는 의미를 되새김질 할 시간은 충분히, 아니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성적에 관심 있는 아이들은 어떤 형식의 평가이던지, 그 평가를 위해 학원에서 문제집을 풀거나 요약된 내용을 외운다. 그렇게 바삐 한 달, 두 달이 지나간다. 충분히 경험하고 생각할 겨를 없이 한 학기를 훌쩍 보내버린 아이들을 볼 때면, 과학 시간에도 여전히 웃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아이들에게는 조금 늦더라도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 * *

□ 아이들에게는 맘 놓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위의 에피소드는 필자가 두어 달 전 수업 시간에 겪었던 일이다. 상당히 인상 깊은 시간이었기에 기억에 남는 대로 메모를 해 두었었고, 이를 다시 정리한 것이다.
당시 수업은 사실 계획에 없었던 것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는 여러 가지 기체를 발생시키고 그 성질을 알아보는 단원이 있다. 그 중 한 기체가 이산화탄소이다. 주된 과정은 염산과 석회석을 반응시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것이지만, 이 단원에서 아이들은 드라이아이스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도 경험하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수조 안에 드라이아이스를 넣고 그 주변에 촛불을 켜 놓아 촛불이 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다. 드라이아이스 보관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한 날에, 그날 과학이 들어있지 않아도, 전체 학급이 돌아가면서 드라이아이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반은 2교시가 과학이었는데, 드라이아이스의 배달이 다소 늦어지는 바람에 그냥 넘어가게 될 상황이었다.
6교시가 되었을 때였다. 필자의 반에 드라이아이스 조각이 큰 수조에 반쯤이나 담겨 왔다. 학년 부장 선생님이 우리 반을 생각해서 남은 드라이아이스를 모아 주신 것이었다. 마침 6교시는 ‘창의적 재량’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미 촛불실험에 대한 설명은 2교시 때 해버린 상태였다. 결국 필자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줘보기로 했다. 그냥 마음껏 드라이아이스를 갖고 놀아보라고. 주의사항을 일러준 후, 아이들에게 드라이아이스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이 드라이아이스로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동안, 필자는 아무 말 없이 물이 담긴 수조 속에 드라이아이스를 넣어 보였다. 또, 필름 통 안에 넣어서 튀어 오르게도 해 보였다. 흘깃흘깃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이들은 곧 다시 이런저런 활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때로는 예상했던 일임에도 신기해하고, 또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들 때문에 신기해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고 밀도 있게 활동을 했다.
필자는 이 에피소드가 아이들에게 ‘맘 놓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장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J. Dewey에 의하면, 경험은 삶 자체, 즉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환경에 적응해 가는 모든 과정이다. 그런데 그 경험은 자연과 대비되는 정신이 객관을 파악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로, 유기체가 자연과 교섭하는 일련의 상호작용(interaction)과 상호교섭(transaction)의 과정으로 진술된다. 전자는 유기체와 환경 간에 맺어지는 통일된 행동의 작용을 말하고, 후자는 상호작용이 완전히 처리되어 통합된 인식의 과정을 말한다(김동식, 2002). J. Dewey에게 있어서 경험은 ‘보는 과정’이기보다는 ‘먹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그 자연(혹은 환경)을 파악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을 먹음으로서 하나로 통합되면서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J. Dewey의 경험관을 수용한다면, 사실 교사가 아이들에게 제공해줘야 할 것은 매우 체계적으로 짜여진 ‘경험의 순서’가 아니라, 스스로 적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경험의 기회’일 것이다. 교과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을 빠듯한 시간 안에 급하게 다루는 그 자체로는 아이들에게 경험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교과서의 내용은 아이들이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이 그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의 기회’를 통해 얻은 것이 제시되어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제시된 것을 잘 가르치는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어쩌면 아이들은 ‘보는 과정’으로서 경험하는 것에 그칠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이 ‘먹는 과정’으로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해 있는 자연(혹은 환경)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아마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아이들이 ‘맘 놓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 아이들에게는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R. Driver(1983)는 과학수업 시간이 수많은 감각적 활동들만 난무하고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아이들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 할 수 없으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선개념들에 의해 걸러지거나 새로이 구성된 상태로 관찰하게 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지식 혹은 개념의 형성은 과학자들이 밝혀 놓은 바를 수용하는 과정에 의하기 보다는 아이들 스스로에 의해서 상상되고 발명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관찰과 더 많은 감각적 활동이기보다는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이고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시간’이다. 생각을 동반하는 토론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고, 경쟁적인 생각을 좇아가고 스스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중략] 이장에서 제안된 생각들은, 단순히 아동들의 감각적인 경험을 확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과학수업에서의 교사의 역할이 아니라고 제안하고 있다. 교사는 아동들이 과학 공동체의 전통적인 이론과 형식주의를 이해하고, 이것들을 그들의 경험과 유의미하게 관련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즉, 아동들의 경험과 이해와, 과학 공동체의 경험과 이해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Driver, 1983, p.84).

이러한 시간의 필요성은 상정논법(혹은 귀추법)의 재정립자로 알려져 있는 C. S. Peirce의 주장으로부터도 제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C. S. Peirce는 의심의 상태에서 믿음의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탐구’로 보았다.

의심은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고 믿음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상태이다. 반면에 믿음의 상태는 우리가 피하거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으로 변화하기를 원치 않는 고요하고 만족스런 상태이다(C.P. 5.372). [중략] 의심의 초조함(irritation)은 믿음의 상태를 획득하려는 투쟁(struggle)을 야기한다. 때로는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이 못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나는 이 투쟁을 탐구(inquiry)라고 부를 것이다(C.P. 5.374). [중략] 의심의 자극은 믿음을 획득하려는 투쟁의 유일한 직접적 동기이다(C.P. 5.375).

그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탐구는 자신이 믿고 있는 바와 상충하는 의심 되는 바 혹은 의심스러운 현상에 직면하여 ‘의심스러움을 느끼는 순간’ 시작된다. 아이들은 그러한 순간을 과연 얼마나 많이 가져 봤을까? 만약 그러한 순간을 가져본 적이 많지 않다면, 그것은 적어도 두 가지 원인, 즉 첫째, 기존의 믿음과 불일치하는 상황이 적게 제공되었거나, 둘째, 혹시 제공되었을지도 모를 불일치 상황을 미처 감지하지 못하거나, 감지했어도 깊게 느낄 겨를이 없이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아이들이 자칫 무의미하게 흘려보냈을 감각적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심의 느낌을 자각하게 되면서 지식의 구성과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아이들이 ‘돌이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 * *

도대체 아이들에게 선물할 시간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위에서 언급한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아이들에게 꼭 긍정적인 영향만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또 다른 고려 사항임에 틀림없다. 어찌 보면 이러한 희망은 대학입학과 비교적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이기에 가져 볼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필자에게는 시간에 쫓겨 허덕거리고 있는 아이들, 그래서 웃자라고 있을지도 모를 아이들의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
글쎄, 잘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우선, 초등학교에서 이뤄지는 과학교육의 장에서는, 웃자라고 있을지도 모를 아이들에게 약간의 시간이라도 선물해주는 것이 어떨까?


[참고문헌]
김동식(2002). 프래그머티즘. 서울: 아카넷.
Peirce, C. P. Collected Papers of Charles Sanders Peirce(ab. C.S.), 8 vols. eds. by C. Hartshone, & P. Weiss(vols 1-6) and A. W. Burks(vols 7-8).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31-58.
Driver, R.(1983). The Pupil as Scientist? The Open University Press: Milton Key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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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재
서울탑동초등학교

과학문화교육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