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06-11-25 (Vol 3, No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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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소리

제1회 졸업생 고 유경로 교수님의 회고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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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사범학교가 사범대학이 되었습니다. 경성사범학교에는 기본적인 핵심조직체가 보통학교, 국민학교를 나와서 경성사범 시험을 보아서 6년 내지 7년을 한 사람이 정통파입니다. 그리고 오래 같이 살았기 때문에 선후배 관계 등 친분도 더 많고 그렇습니다. 해방 후에 경성사범학교에는 주로 그런 조선인들이 많이 모였는데 거기에 그렇지 않은 연습과 출신들이 모여 조병희 선생이 그 때는 가장 연장자로서 우리가 동창들을 조직하여 그분을 회장으로 모셨어요. 그 때에 오천석 선생이 문교장관 격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창회의 나이든 어른들이 오선생을 만나 경성사범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자 사범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언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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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스태드가 군정청 문교부 장관이 되어, 대위인가 뭔가라 하면서 서울대를 종합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사람은 동록을 안 하여 등록 거부 운동이 몇 달 가다가 마지막에서는 모두 학생들 대부분이 등록하게 되었는데 학과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사범대학도 물화학과가 학부에 생긴다고 했습니다. 내가 동록하자 자동적으로 2학년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한 것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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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국무총리 하던 최규하씨가 강사로 나와서 영어 강의 좀 했지요. 그 때에 다른 데 가서 강의하는 것을 더러 듣기도 했습니다. 중등교원양성소에서 청강도 하였습니다. 거기서 배화의 교장으로 있던 경도대학 수학과 출신의 신용국씨의 기하 강의도 들었습니다. 강의가 빨라서 학생들이 필기도 제대로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지독한 강의가 없어요. 아주 재미있었어요. 또 한필화 선생의 강의도 청강하였습니다. 아주 명강의였어요. 그 양반은 시험 봐서 D만 받으면 할아버지고, 전부 F였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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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렇다고 그래요. 일본의 야노 겐타로라는 동경대학 수학 교수가 있는데 이 사람은 시험을 보면 우, 량, 가, 불가 네 등급이었는데 교수하는 동안 성적을 매길 적에 B를 한번 매겼다고 해요. 아마 그런 것을 보고 와서 그랬는지…. 그래서 서울대도 초기에는 점수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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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선생의 강의도 청강하였습니다. 조선어 문법이라고 하여 배웠습니다. 풀어쓰기 법을 강의하기도 하고 한자폐지를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인격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가르치지 말라는 과격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무조건 가르치지만 않으면 한자가 폐지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이 바로 오늘날 실현되고 있습니다. 나는 초기에는 한자폐지는 찬성하였으나 일정한 과도기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나는 세계에서 유일한 표의문자인 한자와 표음문자를 결합해서 쓰는 것이 가장 언어학적으로 우위에 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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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강의를 듣다가 물리화학과 강의를 들어갔으나 선생이 없었습니다. 방성희라고, 경성사범시대에 경성대학을 나온 선생이 중등학교교장을 하다 나가버리고 선생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경성대학에 전기과를 나온 이용규라고 하는 얌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신효선이라는 동경물리학교를 나온 사람을 추천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할 것은 신기범 선생을 만나서 선생 걱정을 했더니, 그때 수학에 조종화 선생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한국 말년에 경도대학 유학생이예요. 이 분이 가르쳤는데 잘 알아듣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신기범 선생의 철학은 ‘적어도 이것이 대학이라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은 적어도 대학을 나와야 하겠다.’ 그러니까 대학을 안 나온 사람을 일체 쓰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돌아가셨지요 신기범 선생이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사범대학의 아카데믹 레벨은 훨씬 더 높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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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신기범 선생은 대학 나온 가장 우수한 사람을 고르려 했었고 중등교원양성소에는 전문학교를 나온 사람도 되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신효선이라는 물리학교 출신이 교수로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강의는 잘 하였으나 너무 느려서 학생의 불평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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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니까 물화학과의 제1회로 제일 선배 격이 되었습니다. 물리학으로 대학을 나온 사람의 리스트를 만들어 대학교수 교섭을 하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섭을 했는데 그 때 대학을 나온 사람이 일곱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학력이 제일 좋았던 사람이 도상록이라고 하는 동경대 물리학과를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정 말기에 신경공대 교수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44년 겨울에 방학이 되어 서울로 왔는데 선배 김양하라는 동경대 화학과를 나와서 일본에 이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간 사람이 있었는데, 이 선배가 후배보고 ‘지금 어느 때인데 만주로 가려하느냐. 다 집어치우고 여기 가만히 있으라’ 하였어요. 김양하씨도 어느 정도는 좌익이었어요. 그러다가 도상록씨도 어떻게 하다가 좌익이 되었고 월북했어요. 그리고 권영대 선생은 고등공업에 교수로 가 있다가 문리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물리를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리를 공부한 몇몇 사람도 대부분은 월북하였습니다.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인섭이라고 연희전문학교 있다가 경성대학 교수로 갔다가 좌익에 가담하여 교수직에서 물러난 사람뿐이었는데 그에게 강의를 부탁하였습니다. 그 역시 6·25 후에 이북으로 갔습니다. 할 수 없어서 물리학과 가장 가까운 천문학의 이낙복 선생이라고 나보다 네 살 아래인 사람에게 교섭을 하였습니다. 그가 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김진문 선생이라고 기상대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경대 기상관리연구소를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유체역학, 열역학 강의를 부탁하려 하였으나 역시 월북하였습니다. 그러니 전부 이북으로 가고 남은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러다가 이영규 선생이 어느 사이에 슬그머니 없어져버리고, 김진문 선생 대신에 기상관리양성소 나온 고신덕이라는 양반이 강사로 나왔지요. 이렇게 해서 물리를 했지만, 거의 배운 것이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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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데에는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나는 하고 싶어도 조선놈이라고 해서, 그리고 집이 가난해서 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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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제시대 때 경성사범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음악을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경성사범은 음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입학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도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매우 우연적인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입학시험이 2월경이었는데 1월 초에 경성사범학교음악선생이 교장선생의 초대를 받아 연회를 하는 도중 술이 취해서 교장을 두들겨 패려고 덤벼들고는 그 때문에 사표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입학시험을 볼 때에는 우연히 음악시험이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내가 경성사범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입학하고 나자 음악 선생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기생 중에는 대부분이 음악 성적이 형편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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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은 공부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내가 차라리 너절한 전문학교라도 가서 공부를 했으면 지금보다는 몇 배 나았을 것입니다. 해방 후에 대학이라고 다녔지만 선생도 없는 대학에 가서 무엇을 배웁니까? 그래도 한인섭 선생 등 권위 있는 양반을 모셔놓고 어찌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자습한 것입니다. 해방 직후의 레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직후 대학을 나온 교수들이 서울대학에 많았지만 그 권위자라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이예요. 그러니 강의 준비는 언제 합니까? 밤낮휴강이지요(웃음). 그 유명한 이상백 선생은 한 학기에 두번쯤 강의했다고 해요. 정순택 선생이 그렇게 강의를 잘합니다. 그분께 함수론을 듣는데, 잘하면 뭐합니까? 한 달에 강의를 몇 번 못합니다. 교무과장을 하느라고 밤낮 술 마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면 휴강이지요. 또 동경물리학교 나온 모 선생이 있는데 함수론을 강의한다고 하여 일주일에 4시간씩 한 학기를 하였으나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박혁재 선생은 경도대학에서 학위를 하고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과 싸움만 하였습니다. 일본어책을 가져와서 번역하며 읽듯이 하니 학생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서울대학이 이 모양이니 여타 대학은 어떠하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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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때 존경하는 분으로 연세대학의 장기원 선생이라고 있는데 성미가 급했어요. 화학실험을 해야 하는데 약품이 없으니 인천까지 가서 약품을 사가지고 운반하려고 마차에 실어서, 소위 대학교수가 마차 뒤에 앉아서 연세대까지 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연세대학에 사이언스가 비교적 일찍 일어난 것이 장기원 선생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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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희 선생이 물리과로 왔습니다. 이분도 괴짜였어요 그런데 한번은 여학생이 입학하였습니다. 여학생이 오면 공부 다 틀렸어(웃음)라고 하여 내쫓아버렸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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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럭저럭 졸업을 하게 되니 34세였습니다. 그 때까지 나는 미혼이었습니다. 졸업 후 신학교에서 1년 동안 지낸 다음 다시 사대물리과에서 조교를 하였는데 무급 조교였고 발령도 없었어요. 나는 그 때까지 이력서를 내 본 적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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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25 때 피난 가서 학교를 만들 때에도 사령장 없이 강의를 하였습니다. 홍익대에 조교수로 잠깐 갔을 때에도 임명장도 없었습니다. 그 물리과에 고등학교에서 1,2등한 아주 우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6·25를 치르고 나니 다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다 끌려갔지요. 납북되어 가거나 의용군으로 끌려갔습니다.
1·4후퇴 후 내가 고향에 갔더니 피난 온 아이들을 교육시키라고 하여 폐허 속에서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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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정과 교수였던 신기범 선생 부인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사범대학에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전쟁 통에 교수들이 사라진 마당에 전임강사가 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주 들어오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시간강사가 되었으며 56년 대우 조교수라는 명목으로 취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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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정범모 선생이 미국에서 석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는 미국 가서 석사하고 오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이 양반이 교육과정을 바꾸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2시간 강의를 일주일에 두 번 하여 4시간 하던 것을 1시간으로 하여 3시간 단위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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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영 선생이라는 교육과 교수가 교무과장을 하고 있었어요. 교양과목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부쩍 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교양과목이 없었어요. 미국에서도 휴매니티라고 한다고 해서 교양과목을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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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우 조교수로 오기 전에 물리과의 경우 1학년에 수학과목이 한 과목도 없었습니다. 1학년 과목은 전부 교양과목이었습니다. 하루가 새로운데 사이언스 하는 사람이 1년 동안 수학을 안배우면 2학년에 가서 무엇을 하겠어요? 그랬더니 정연태 선생이 야단을 쳤어요. 이런 커리큘럼을 짰어요. 정범모 선생은 매우 똑똑한 사람 아닙니까? 어떻게 교양과정만을 강조하다 보니 교양과정에 밀리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물리, 생물, 화학하는 사람들이 1학년에 수학을 배우지 못하였지요. 그러다가 문제가 많아 복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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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강의를 한 시간씩 가르치기로 하였습니다. 사범대학이 서울대학에서 제일 먼저 3시간 단위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서 63년에 돌아와 보니 어느 사이에 3시간을 연거푸 하는 강의가 많이 생겼습니다. 월급으로는 모자라 다른 대학에 출강하다 보니 3시간을 몰아서 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대학에 강의를 나갈 수 있는 과가 이것이 심하고 우리 과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교육학과 선생이 제일 먼저 교육과정 개편을 주장하였지만 교육학 강좌의 인기가 좋아지고 타 학교로의 출강 기회가 많아지게 되자 거기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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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사범대학이 여자사범과 합쳤을 때 이야기입니다. 참 우스웠습니다. 캠퍼스가 둘이 되었어요. 청량리 교사와 종암국교를 사범 부속으로 하고 그 옆의 땅과, 적산 가옥을 합치면 을지로 교사의 땅보다 훨씬 넓었으므로 을지로 교사를 그 쪽으로 옮기도록 건의를 하였으나 교수들은 청량리 통근이 불편하고 다른 대학 출강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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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교수의 봉급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때 이런 농담이 유행하였습니다. 국민학교 선생이 집을 가지면 고등학교 선생은 전세를 얻고 대학 선생은 셋방 산다고 했어요. 어느 정도 사실이며 우리 동기 중에서 국민학교 교장을 한 사람이 지금 보니 제일 돈이 많습니다. 대학에 나갔던 사람이 제일 돈이 없고 이것이 아마 우리나라 현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을지로가 자연히 교사가 되었다가 훨씬 후에 교통이 나아진 후에 청량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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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13일)

첨부
유경로선생님_0427.hwp

고 유경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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