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07-01-25 (Vol 4, N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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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소리

섬마을 선생님

섬 유배(流配)는 당사자에겐 괴로운 형벌이었지만 그 지역 주민들로서는 대과(大科)에 급제한 일류 교사에게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축복이기도 했다.

순조 1년(1801) 정치적 박해를 받아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丁若銓)은 ‘자산어보’(玆山魚譜) 서문에 “나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의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으로 썼다. 자(玆)자는 흑(黑)자와 같다”라고 쓸 정도로 흑산도 유배를 두려워했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700여 명이었는데 동생 정약용이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형님은)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 다투어 자기 집에만 있어 주기를 원했다”라고 쓸 정도로 정약전을 환영했다.

정약전이 환영받은 것은 섬 아이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흑산도 사리 언덕에는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복성재(復性齋·사둔서당)가 남아 있다.

정약전은 순조14년(1814) 강진에 유배돼 있던 정약용이 풀려난다는 소문이 돌자 동생에게 바다를 두 번 건너게 할 수 없다며 흑산도 앞의 섬 우이도로 옮기려 했다.

흑산도 사람들이 결사반대하고 나서자 우이도 사람들은 안개 낀 야밤에 배를 대고 정약전을 모셔갔다. 안개가 걷힌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흑산도 사람들은 급히 추격대를 조직해 정약전을 다시 모셔왔다.

정약전은 1년 가까이 흑산도 사람들을 설득해 겨우 우이도로 이주했으나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정약전도 순조 16년(1816) 6월 우이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약용이 이굉보(李紘父)에게 “온 섬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다”라고 쓴 것처럼 섬사람들은 불행했지만 진정한 선생님에게 예의를 다했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도서벽지 근무교사에게 주는 가산점을 줄이겠다고 하자 도서벽지 근무 교사들의 전근신청이 잇따른다는 소식이다. 유배객의 신분으로 섬사람들을 감동시켰던 정약전의 교육정신과 벽지 교사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가 모두 아쉽다.


조선일보 <2007.1.25.목>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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