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05-05-25 (Vol 2, No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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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와 토착화 연구개발 활동

우장춘(禹長春), 어떤 분이신가

- 종의 합성 연구와 우량종자 개발에 헌신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1898년 4월 8일 아버지 우범선(禹範善)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仲)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 우(禹)씨인데, 일본의 호적에는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로 되어 있으나 영어 논문에서 Nagaharu U로 표기한 것을 보면 자신의 성을 ‘우’로 고집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에도 굴하지 않고, 일본의 히로시마현 구레에서 중학교를 마쳤고,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하여 퇴직할 때까지 육종학에 대한 20 여편의 주옥같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초등학교 교사인 일본인 스나가 고하루(須永小春)와 결혼하여 딸 가자(佳子), 창자(昌子), 엽자(葉子), 조자(朝子), 아들 원춘(元春), 계춘(季春)을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일본에서 살았다.

1950년 귀국하여 사망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중앙원예기술원장, 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귀국 후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육종과 원예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십이지장 궤양으로 국립의료원에 입원할 정도로 약화된 병세에도 불구하고, 그 때 한참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 봉투에 넣어 링거병을 거는 파이프에 묶어놓고 관찰할 정도의 과학자이었다. 정부의 문화포장을 받는 자리에서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라고 말하고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8월 10일 마침내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타계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치뤄졌으며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의 조문이 잇달았다. 유해는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에 안장되었다.

우장춘 박사의 과학기술 관련 주요 업적 및 영향

종의 합성 이론을 실험(우장춘의 트라이 앵글)
일본에서 종간 잡종을 연구하면서 그 당시 주장되던 ‘종의 합성’이론을 배추(Brassica)속에서 실험하여 유전육종학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배추(염색체 수, n=10)와 양배추(염색체 수, n=9)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염색체 수, n=19)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하여 종간 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다. 이 연구는 실험을 통해 현존하는 식물을 실제로 합성한 최초의 예로 알려지고 있다. 이 연구에서 제시된 배추, 양배추, 유채의 게놈(염색체) 사이의 상호 관계를 ‘우장춘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로 부른다. 이 연구를 통해 우장춘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박사의 논문은 세계적인 유전학자인 다윈의 “진화론”의 일부를 수정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배추 속에서 종의 합성에 대한 실험적 입증은 유전학적으로 종들의 염색체 구성과 상호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명한 것이고, 진화학적으로 종의 교잡에 의해 새로운 종이 탄생될 수 있고 육종학적으로 종의 합성 이론에 근거해서 종자 육종과 개량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로 인해 우박사는 일본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겹꽃 페튜니아(우장춘 꽃!)의 육성
홑꽃 페튜니아는 암술과 수술이 모두 정상으로 수정에 의해 종자 번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겹꽃 페튜니아는 암술이 퇴화되어 종자 번식이 되지 않아 꺽꽂이로 번식을 해야 하므로 대량 번식이 곤란하였다. 이에 사카다 종묘 회사에 근무하던 우장춘 박사는 종자로 번식하는 겹꽃 페튜니아를 개발할 필요성을 인식하여 연구를 하였다. 당시에 겹꽃 페튜니아의 종자 값이 너무 비싸서 같은 양의 백금 값과 맞먹었다 한다.
우박사는 겹꽃 페튜니아를 육성하여 인공적으로 화훼 품종을 만들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으니, 이꽃을 “우장춘 꽃”이라 할 만하다고 하겠다. 겹꽃 페튜니아 종자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사카다 종묘 회사는 겹꽃 페튜니아 종자의 수출로 회사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우량 종자의 개발
해방 후에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들여오던 각종 종자의 반입 중단으로 국가적인 곤경에 처해 있었다. 특히 당시의 식생활에 필수적인 김치 등을 만드는데 필요한 채소류는 국민의 식생활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에서 귀국한 우박사는 가장 먼저 채소류 종자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우박사는 일본에서 직접 개발했거나 얻어온 종자에다 학문적 이론에 근거하여 체계적인 육종 연구를 수행하여 짧은 시간에 우수한 종자의 확보와 개량을 이루었다. 그 결과 1950년대에 한국은 채소와 일부 작물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오던 것에서 탈피하여 우량 종자의 확보와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우박사의 주도 하에 채소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과만도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야채 재배에 있어서 기생충 감염이 심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청정 재배를 시도하여 생산된 야채를 외국인에게 공급하기도 하였다.
우박사는 제주도의 기후라면 귤 재배가 가능하다고 보고 온주밀감과 같은 품질 좋은 묘목을 도입해서 재배기술을 지도하고, 방풍 울타리를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건의하였다. 이로 인해 귤나무의 시험 재배와 품종 개량의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어 제주도와 남해안 일부 지역이 대규모의 감귤 생산지가 되는데 이바지하였다.


원예시험장의 창설과 후진 양성
최신의 학문과 기술에 바탕을 두고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원예육종학 전문가를 육성하고, 종자 개량 및 육종 연구를 담당할 원예시험장(현재의 원예연구소)의 창설과 정착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우박사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원예시험장에서 활동했던 연구 인력이 약 40명에 이르렀는데, 많은 우수한 젊은이들이 어려운 연구 환경과 박봉에도 불구하고 모여들었으며, 이들은 우장춘 박사로부터 최신의 유전육종과 종자 개량에 대한 지도를 받으면서 학문적인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우장춘 박사가 이끈 연구소는 꾸준히 성장하여 원예시험장으로 발전하였으며, 한국에서 원예 연구의 대표적인 연구 기관으로 발돋움하였다. 우박사 사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원우회(園友會)’를 만들어 우박사의 유지를 받들어 원예인들의 친목과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우장춘 박사와 관련된 이야기

민들레는 밟혀도 꽃을 피운다.
우장춘은 4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생활이 어려워져 여섯 살 때부터, 1년 동안 고아원에서 생활하였다. 우장춘과 같은 고아원에 있던 힘센 일본 아이가 “너는 조선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 조선은 이제 일본의 속국이 되었단 말이야. 나라도 없는 녀석이 까불어?” 하며 놀림을 받으며 얻어맞았다. 이 일을 어머니가 알고는 우장춘에게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우장춘에게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 후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 조선인의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줄곧 수석을 하였다. 또한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다닐 때 자취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굶기도 하였지만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말을 잘 못했던 우박사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와서 연구를 시작할 때 우박사를 좋지 않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을 무척이나 미워하고 있었는데, 우장춘 박사는 일본말을 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은 모두 알아들었고, 우리말로 되어있는 신문이나 책도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우리말 발음을 잘하지 못하였다.
한번은 높은 자리에 있는 정치가가 우장춘 박사에게 일본말만 하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냐고 무척 비난을 했다. 그러자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 한국에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까지 입을 열면 더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그저 벙어리 한사람 늘어났다고 생각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웃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박사의 유머스럽고 서글서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씨 없는 수박 이야기
우장춘 박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씨 없는 수박’ 이야기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우장춘 박사가 아니라 우박사와 친분이 있던 일본 교토대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이다. 기하라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것은 1943년경이다. 그렇다고 우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박사가 1935년 실험적으로 증명한 ‘종의 합성 이론’이 씨 없는 수박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우박사는 광복 후 1953년 한국에서 씨 없는 수박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 일로 인해 한국에서는 우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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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재
과학문화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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