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09-02-25 (Vol 6, No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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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소리

[형애장학회] 남몰래 장학금 지급한 최형규옹

택시회사 (주)동신운수를 운영하는 최형규(催亨圭·84·서울 종로구 내수동)옹이 최근 종로구에 70억원의 장학금을 쾌척했다고 해서 화제다. 그래서 그를 ‘선행을 좋아하는 유명인’쯤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옹은 40여년간 선행을 하면서도 자기를 극구 숨겼다.

70억원의 장학금도 사실은 지난해 기부 당시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으나 최근 종로구청측이 장학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그 내용을 구 의회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졌다.

1921년 경기 광주시에서 태어난 최옹은 흥남비료공장 직공, 쌀장사, 연탄장사 등을 하며 번돈으로 1966년 택시회사를 인수했다. 그가 ‘남몰래’ 선행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즈음부터.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보내주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수백 명에 이르렀다.

1993년 최옹은 아예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기술전문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당시 교육부 차관이던 조규향 현 방송통신대총장으로부터 “장학재단을 세우는 것이 고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권유를 받은 뒤 방향을 전환하고 53억원을 출연해 형애장학회를 세웠다.

이듬해 최옹은 사후 모든 재산을 장학재단에 기부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했고 2002년에는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 없다”며 부동산을 처분해 장학재단에 100억원을 더 냈다.

형애장학회는 지금까지 대학생 968명에게 19억4600여만원을 지급했고, 서울대과학교육연구소 등에 10억9000만원을 기부했다.

최옹의 선행이 맺어준 인연이 ‘30년 우정’으로 이어져 오기도 한다. 1975년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의 이용수(李龍水) 기자는 등록금이 없어 고생하던 고려대생 서정희군에 대한 기사를 썼고, 최옹이 이를 보고 장학금을 보낸 것이 계기가 돼 세 사람이 아직도 각별하게 지내고 있는 것.

현재 새미래인사이트 소장인 서씨는 “처음엔 도움을 준 분이 누군지도 몰랐고, 최선생님이 그렇게 많은 학생을 도왔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고 말했다. 서씨는 1990년 한 월간지에 최옹과 이용수 기자에 대한 추억담을 기고했으나 이때에도 최옹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바람에 최옹을 ‘그분’으로 표현했다.

동아일보 <2009.1.20>
장강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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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형애장학회 및 종로장학회 이사장 최형규 옹 별세

2009년 2월 3일 서울 강북삼성병원

발인 2월 7일 오전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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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형규 형애장학재단 이사장 ‘사후에 밝혀진 진실’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장례식장. 88세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읽던 서정희 씨(56.이솝러닝 전문위원)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열세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 친형을 형장의 이슬로 떠나보내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사람. 수백억 원의 재산을 6000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하면서도 본인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

서 씨가 추모사를 읽는 동안 35년 전 두 사람의 인연을 맺게 해준 전직 신문기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등록금이 맺어준 인연

1974년 12월,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운동장.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던 서 씨는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리학과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합격의 기쁨보다는 등록금 걱정이 앞섰기 때문.

고교를 졸업한 지 4년. 입주 과외, 막걸리 배달, 시장 행상…. 먹고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예 원서를 내지 않아따면 이토록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며칠을 고민하던 서씨는 불현듯 신문에 소개된 한 여학생이 독지가로부터 등록금 도움을 받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떠올렸다.

무작정 동아일보로 편지를 보냈다. 서 씨의 편지를 본 사람은 사회부 기자이던 이용수 서울낫도 대표(1998년 퇴사). 이 대표는 서 씨의 사연을 1975년 1월27일자 동아일보 ‘휴지통’란에 소개했다.

기사가 나간 뒤 서 씨에게 한 중년 남자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는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 앞 찻집. 서 씨를 만난 중년 남성은 고려대에 등록금 25만 원을 내고 받은 영수증을 건네고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채 찻집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그는 세 차례 더 서 씨의 등록금을 내 주었다. 수소문 끝에 서 씨는 그가 택시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 그의 이름이 ‘최형규’라는 것을 알아 내고 찾아갔지만 그는 인사도 받지 않았다.

졸업한 뒤 직장인이 된 서 씨는 매년 5월 그를 찾아갔지만, 미리알고 피하기로도 하듯 매번 자리에 없었다.

인연을 맺은 지 16년 만인 1990년, 이들 세 사람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4·19 혁명을 촉발시켰던 3·15 부정선거를 지휘했던 죄로 사형을 당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나의 친형”이라며 “내가 죽기 전에는 이 얘기를 세상에 말하지 말라”고 했다.

○ “4·19의 도화선 3·15 부정선거 책임자의 동생”

당시 택시회사 대표였던 최형규 형애장학재단 이사장은 음식점에 앉자 “45세 때부터 수백 명의 아이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며 “형과 여동생이 있는데, 형이 바로 최인규씨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배워서 사람 죽이기보다, 못 배워도 사람을 키우고 싶어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이 사연을 기사로 쓰고 싶다”고 말했지만 최 이사장은 “숨어서 돕는 것이 훨씬 편하다”며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 대표와 서 씨 두 사람은 최 이사장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1921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최 이사장은 흥남비료공장 직공, 연탄 장사, 쌀 장사를하며 돈을 모았고 1966년 택시회사를 인수했다.

이 무렵부터 최 이사장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그 중의 한명이 바로 서 씨였다.

이대표는 “최 이사장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봐 동아일보에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며 “직접 고려대 입학처에 문의해 서 씨의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 “한 알의 모래처럼 장학사업”

최 이사장은 1993년 153억 원을 출연해 자신과 부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형애장학재단’을 설립했다. 2004년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종로구에 70억 원을 전달했고 종로구는 이 돈으로 ‘종로구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하지만 최 이사장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극구 꺼렸다. 형애장학재단 관계자는 “지금까지 6000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장학금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최 이사장님의 이름조차 모른다”며 “그 흔한 장학금 전달식 사진 한번 찍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은 자신의 호(號)도 ‘항상 숨어있는 한 알의 모래처럼 살겠다’는 뜻으로 일사(一沙)로 썼다.

최 이사장이 남몰래 장학금을 내놓은 것은 단순히 가족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대표는 “형에 대한 연민,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던 한(恨), 국가에 대한 감사 등 여러 이유로 장학사업에 매진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서 씨 역시 “최 이사장은 우리나라가 잘사는 방법은 인재육성밖에 없다고 생각해다”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때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게 보답하는 길이다’라고 핀잔하듯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한상준 기자
동아일보 <2009.2.20>

(사진과 더불어 좀 더 상세한 내용은 첨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형애장학회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직장을 구한 다음에 얼마라도 장학회에 희사함으로 더 많은 다른 사람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 기대 됩니다.

편집 머슴)

첨부
형애장학회_최형규옹.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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