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15-02-25 (Vol 12, No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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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소리

창파(滄波) 이태영 박사는 누구인가?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의 발달은 헌신적인 두 사람이 주도했다. (1) 이영식 목사(1894-1981)가 특수교육을 시작하였고 (2) 이태영 박사(1929-1995)는 목사의 아들로 대구대학교의 총장이 되어 특수교육을 이어받았다.

이영식 목사(1894-1981)

이영식 목사는 장애학생을 도우려는 목표와 열정을 가지고 특수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장애아의 특수교육을 위해서는 정부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49년 이 목사는 국회에서 획기적인 연설을 하였다. 국회에서 이 목사가 연설을 하는 동안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학생들이 함께 하였다. 이 학생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시각장애 학생들은 주판으로 자신들의 수학능력을 보여주었고 청각장애 학생들은 수화로 자신들의 언어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목사의 연설과 학생들이 보여준 능력은 장애 학생들의 교육권을 확보하기 위해 수행한 사회운동이라 불렸다. 이 목사의 연설과 활동은 한국 특수교육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목사의 연설 후 30년이 지난 1997년이 될 때까지 특수교육진흥법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였다. 시각과 청각 장애 학생을 위한 학교가 대구에 세워졌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1950년 6월 첫 졸업 이후 곧 바로 남북한 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 목사는 북한군에 의해 고급 스파이로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수용소에서 북한 공산당의 지도 반장이자 목사가 되었다. 이 목사는 총살의 위협에서 기적적으로 도망쳤다. 총살자 중 한 사람이 감옥의 목회자이며 시ㆍ청각장애학생의 교육자이며 나환자 교회의 목사였던 이영식 목사를 알아봤다. 처형수는 이 목사를 도망치게 하고 허공에다 총을 쏘았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의 도주로 이 목사는 장애학생들을 돕고자하는 헌신과 열망이 더 강해졌다.

창파(滄波) 이태영 박사(1929-1995)

이태영 박사는 (1929-1995) 이 목사의 업적을 이어 받은 아들이다. 독립 이후 (세계 2차 대전 종말)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의 역사는 한국 특수교육 역사가 반영되어있다. 이 목사는 한국 청각장애와 시각장애를 가진 특수교육 뿐만 아니라 지적장애와 지체부자유 특수교육의 선구자이다. 아버지처럼 이태영 박사는 한국의 특수교사 양성에 그의 에너지를 모두 쏟았다. 이태영 박사는 대구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대구대학교는 다양한 특성화과에 20,000명이 넘는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학과는 공학, 경영, 사회복지, 직업재활, 교육과 특수교육이다. 대구대학교는 원래 이 박사가 설립하였고 현재 다양한 특수교육 연구소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특수교육의 독특한 성공담이 되었다. 독특한 이 역사는 특수교육역사에 있어 아마 유래가 없는 일 일 것이다.

(다음에 있는 특별 초청강연 '한국의 특수교육: 대구대학교(Special Education in Sout h Korea: Daegu University)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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