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교육"

2005-06-25 (Vol 2, N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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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와 토착화 연구개발 활동

이태규(李泰圭), 어떤 분이신가

-한국 화학계 성장에 기여한 이론 화학자 -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을 좌우명으로 했던 이태규(1902-1992) 교수는 충남 예산에서 한학자 이용균씨의 6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개명한 한학자였던 그의 부친은 이태규의 호기심을 억압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었으며 자립심과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아버지의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다. 남달리 영특한 이태규를 학교에 일찍 입학시켰지만 성적이 뛰어나 월반을 거듭해 4년 만에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도지사의 추천으로 당시 최고의 명문이던 경성고보에 입학하였다.

경성고보에 입학한 이태규는 화학을 가르치던 일본인 호리 선생의 조수로 남게 되면서 여러 가지 실험을 도왔는데, 그중 산소제조 실험을 가장 재미있어 했다는 것이다. 소학교 교사가 되고자 했던 이태규는 호리선생의 지도로 세계적인 화학자의 꿈을 갖게 되었다.

1920년 관비 유학생으로 결정돼 일본 히로시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년여를 밤낮으로 공부하여 모든 분야에서 일본 학생을 제치고 수석의 자리에 올랐고, 1924년 교토대학교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입학하였다. 교토대학 3학년 때 일본 최고의 화학자인 호리바 신기찌가 지도교수로 결정되었는데, 호리바 교수는 일본인 학생들 보다 이태규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었다. 1931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일본 언론이 보도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국내에 일자리가 없었던 이태규 박사는 조수로서 7년의 세월을 교토대학에서 보냈다. 그 동안 온갖 차별대우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여 조선인이라는 차별을 극복하고 교토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는 교수회의에서 호리바 교수가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라고 주장하며 임용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비록 조교수가 됐지만 학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던 이태규 박사는 세계석학들이 모여 있는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했지만, 일본 정부는 전쟁준비로 외화를 낭비할 수 없다며 국비유학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금강제약을 경영하던 전용순씨가 미국까지 여비전액을, 그리고 경성방직의 김연수씨가 미국에서의 생활비를 부담해 주었다. 그는 쌀 200가마 값인 1천원을 주며 "이 돈은 나 개인 김연수가 주는 것이 아니고 조국이 그대에게 주는 돈이라 생각하고 받으시오. 우리민족이 갱생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당신 같은 인재를 길러야 할 것이오. 적은 돈이긴 하지만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오. 이 돈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오.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로되 뒷날 성공하여 조국에게 갚으면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 프린스턴 대학은 과학의 첨단에 있는 세계적 석학들이 모여 있는 요람이었다. 화학에서는 테일러, 아이링 같은 유명한 액체 이론가들과 물리학의 위그너, 아인슈타인 같은 석학들이 있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초청학자의 자격으로 이론화학자인 이이링 교수와 함께 연구발표를 해 미국학계에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41년 험악해진 미일간의 관계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와 양자화학을 도입한 선구자가 되었다.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 부장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하였으나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1948년 아이링 교수가 있는 유타대로 갔다. 그곳에서 25년 동안 다양한 업적으로 세계 화학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 가운데 유명한 논문이 "비뉴턴 유동이론"과 관련 된 것인데, 아이링 박사와 공동으로 연구하였기 때문에 "이-아이링이론: Ree-Eyring Theory"라고 불린다. 이 논문은 625 동란으로 생사조차 모르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잊으려고 밤낮으로 연구한 결과라고 전한다.

1969년 노벨화학상 후보에 올르기도 하였는데, 그 후 노벨상 추천위원이 되었다. 1973년 귀국하여 젊은이들과 어울려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일제시대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미국시민권을 가지라는 주변의 유혹을 물리친 이태규 교수는 1992년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나라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곧은 과학자였다.

이태규 교수와 관련된 몇 가지 일화

이태규 박사가 한국에서 가장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언어생활이었을 것이다. 이태규 박사가 시장 모퉁이를 가니 '왕대포'라고 쓴 간판이 죽 늘어서 있어서 깜짝 놀랐다. '아직 한국은 남북분단이 되어 있으니까 집집마다 대포를 놓고 파는 모양이구나. 저렇게 많이 큰 대포를 파니 언제나 통일이 될까? 어서 통일이 되어야지...' 의문을 가진 채 과학원으로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심각하게 물었더니 그의 말을 듣고는 깔깔대고 웃었다는 것이다.

TV 뉴스를 보다가 버스 안내양들이 "삥땅"을 챙겼다는 말이 나왔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뉴스에 나올 정도라면 버스비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부인에게 물어보고 난 후에야 알았다는 것이고 "통닭"이라고 쓰인 간판을 보고 닭통과 닭을 한꺼번에 파는 집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고는 통째로 굽는 닭이 통닭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혼자 웃은 일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한국 실정에 어두웠다.

이태규 박사는 한국의 실정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대학을 나서서 거리를 걸으며 간판의 글씨를 열심히 읽고, 잘 모르는 것은 제자들에게 물어보려고 수첩을 꺼내 열심히 적다가 미행을 당하고 모의간첩으로 오해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태규 교수의 발자취 찾아서

국립서울과학관 4층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인 중 14인을 선정하여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만들어 업적을 소개하는데, 이태규 교수는 어린시절부터 노년까지의 사진과 대표적 연구 결과인 이-아이링 이론식을 전시하고 있다. (http://hall.ksf.or.kr/ani_set.html)

서울 흑석동 국립현충원에는 나라의 발전과 민족중흥을 위해 몸 바치신 국가유공자 61위가 제 1, 제2, 제3 묘역 등에 안장되어 있는데, 이태규 교수는 제 2 묘역에 안장되어있다. 유품전시관 충훈실에는 이태규 교수의 경도대학시절 노트, 과학기술원에서 연구하신 노트, 사용하시던 지팡이, 연구하다 쓰고 남은 몽당연필, 훈장, 신문기사, 전기집, 국제 저명 학술지에 발표논문, 유타대학시절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태규 교수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 있는 예산초등학교에는 동상이 있으며, 한국과학기술원 과학도서관 입구에 이태규 박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도서관 전시장에는 앨범과 학위증이 전시되어있고, 기증도서가 보관되어 있다. (참고: 최취임 등, 이태규 교수 발자위 찾아서,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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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재
과학문화교육연구소

첨부
7월이태규박사.hwp

"국제화와 토착화" 투고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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